소설을 굉~장히 오랜만에 읽었다. 그것도 국내 소설을. 최근 들어 읽는 문학이라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니는 각종 썰 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책으로 된 문학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게 된 경위는 우선 백만년 만에 새로운 독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첫 번째로 읽어오라는 책이 이 <모순> 이라는 책이다.
강력한 흡인력
<모순>은 1998년에 쓰여진 소설이다. 양귀자 라는 이름은 꽤 유명해 보이지만, 원체 소설에 관심이 없던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꽤 예전에 발표된,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작품을 접할 일이 없었을 터. 하지만 이 책의 첫 구절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뭔가에 홀려 독서 모임이고 뭐고 그냥 재밌어서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어버렸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라고 외치는 진진이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를 보고서는, 명명백백하게 스스로를 설명해보라는 본인의 요구에 맞닥뜨렸다 하는데,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있지? 싶었다. 진진이 장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 마음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거기로 찬 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는 기가 막힌 묘사를 어떻게 하나 싶었다. 당연히 지금 내가 쓰는 말들은 빌린 말들 뿐이니 이 작가의 표현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나의 밑천이 드러나는 표현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전체적으로 표현이 풍부하고 흡인력이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작가 노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책의 중반부 쯤에 이르렀을 때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쓰게 되었나 궁금하여 책의 앞뒤로 작가 노트가 있는지 찾았다.
<모순>에서 나는 장편의 이익을 많은 부분 포기했다. 할 수 있는 한 ‘절대 몰입’의 단편 정신으로 가고자 애를 썼다. (중략) 한 권의 책을 알뜰살뜰하게 읽는 법에 대해 궁리를 하다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메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작가 노트 – 3
다만, 그 표현력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할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화자가 진진이긴 한데, 어떻게 이런 비유를 25살 청년이 할 수 있을까, 라는. 잠시 동안이지만, 이런 찰떡같은 표현은 평생 글쓰기만 해온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업적이다, 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다시 몰입을 시작하는 나.
왜 이렇게 흡인력이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나의 깊이가 얕기에 하지 않겠다. 다시 책을 훑어보며 발견한 것 한 가지는, 진진이 그렇게는 자주 울지 않았던 것… 또 책을 읽으면서 잠시 소망이 있었다면, 진진이 말고 다른 화자가 하나의 에피소드를 맡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정도이다. 작가가 다른 인물을 통해 하는 말들이 또 궁금했으니까.
하여튼, 인상 깊었던 구절들이 나는 너무 많아서 일일히 적을 수도 없다.
모순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평소에도 모순이라는 개념을 많이 상상한다. 누군가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왜 이렇게 추상적인 말을 제목으로 해놓았는지 의아했겠지만, 나는 삶 자체가 모순이라는 말이 너무 뻔해서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아 그냥 무덤덤한 느낌이었다. 또한 무수한 인생 각자가 맞이하는 모순의 색과 형태가 모조리 다르다는 것도 잘 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지리멸렬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을 봐왔다. 나 또한 안정적으로 커왔던 것 치곤 외로움을 잘 느낀다. 진진이 느끼는, 담담한 말투로 그려낸 삶의 모순도 길다란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앞서 이야기했듯 작가의 표현력이 많은 일을 했겠지만, 하여튼 삶은 모순이라고 해서 그게 막 경외스럽거나 대단한 것도 아니고, 또 사소하거나 터부시될 만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이 편안했다. 정답이 없으니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하든, 김장우를 선택하든 둘 다 설명이 가능한 흐름이고, 결정이 일어났다면 그때서야 이유를 찾아도 된다. 이렇게 보니 진진의 마지막 한 마디와도 좀 비슷한 것 같다. 인생은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고. (다만 진진이 초반에 김장우에게 이모를 자기 어머니라고 거짓말하는 장면에서는, 혹시 저것 때문에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야 라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도 소설은 담담하게 흘러가서 좋았다.)
내가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인 사회심리학에서, 사람들은 이미 저지른 행동에 대해 본인의 성격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에 항상 봉착하게 된다. 최근에 어떤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행복해서 사건들이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아니면 행복한 사건이 일어나서 행복해지는 것일까? 이러한 무한 굴레 속에서 도대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